
아천은 안 보인다는 핑계로 설양의 눈 위까지 면사를 덮은 뒤 깔깔거렸다. 난 못 보니 망정이지, 이제부턴 남들 눈 생각도 좀 하고 다녀라! 설양은 격분했다. 가엾은 면사는 그대로 열세 갈래로 조각날 뻔했으나 효성진의 한 마디 덕분에 찢어질 위기를 모면했다.
“그대한테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내 볼 수가 없어서 한이네.”
설양은 입을 다물었고, 아천은 설양의 귀가 벌겋게 물드는 것을 보았으나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뒤로 설양은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때면 군소리없이 얼굴을 가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면사는 설양이 입모양으로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멀쩡히 가려 주었다. 하지만 ‘신비주의에 성격 더러운 벙어리 도장’이라는 괴랄한 소문을 퍼뜨린 주범이 바로 이 면사라는 걸 설양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설양의 다리가 나은 뒤 효성진은 의성을 떠날 채비를 했다. 아천은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설양은 길이 갈라질 때까지만이라며 설렁설렁 뒤따르다 결국 갈림길을 찾지 못해 이 지경까지 왔다. 그러는 동안 효성진은 몇 번이나 오지랖을 부려 세간의 일을 해결해 주었다.
소매 한 번 떨치고 가버리면 될 일을, 효성진은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모른 척할 줄을 몰랐다. 설양은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야렵에서는 열정적인 아천보다 의욕 없는 설양이 한층 더 도움이 되었다. 아천은 천부적으로 몸이 날렵했으나 애초에 차근차근 단을 맺고 수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그래서 효성진은 급한 대로 비상시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개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일일이 봐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천이 설양에게 넌지시 수련을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솔직히 휘말려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효성진과 단 둘이 남을 수 있으니 편할 텐데, 내가 굳이?
하지만 설양은 아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달에는 구름이 가리고 바람도 더는 불지 않았으니 이제 명월청풍은 간 데 없다. 오죽하면 본인도 도움받은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그냥 지나가는 객인이라며 얼버무리지 않겠는가. 그건 설양이 지켜본 모든 선인의 말로 가운데 가장 흡족했다. 그래서 설양은 기꺼이 여흥을 베풀기로 했다.
“야, 일어나. 어제 알려준 거 한 번 보자.”
“싫어. 도장님 있을 때 해. 괜히 나 괴롭힐 거잖아!”
바닥에 누운 설양이 슬슬 시비를 걸자 아천이 팩 화를 냈다.
“안 해? 나 한 대라도 치면 내가 하루 동안 네 동생이다.”
“흥, 너같은 동생 필요 없거든.”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아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대를 꽉 잡는 걸 보니 할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설양이 냉큼 따라 일어났다.
“천 사매, 한 수 주시죠?”
불행 중 다행인지 설양이 제법 얄밉게 굴어 아천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안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척하는 게 더 어려운지는 본인만이 알 노릇이나, 아천이 씩 웃으며 어깨 너머로 간대를 넘겨 걸쳤다.
03
- BGM LIST -
[ MAIN ]
[ 2ftt ]
[ 멍개 ]
[ 시레 ]
[ 하듀 ]